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도요토미 히데요리 (문단 편집) === 세키가하라 전투 === 1600년 이시다 미츠나리를 필두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군사를 일으킨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 때 히데요리는 고다이로의 일원이자 서군의 총대장으로 옹립된 [[모리 데루모토]]의 비호 하에 있었으며 히데요리의 친위대인 나나테구미(七手組)의 일부 또한 서군에 참가하여 사실상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 편에 속하였다.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명분상 서군과 동군이 모두 히데요리 공을 위하여 군사를 일으켰음을 천명하였으므로[* 그래도 아버지가 쌓아올린 것들은 있어서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동서 양군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위한다는 명분을 기치로 삼았다.]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충성스럽고 의로운 인물로 치하하며 위로하였다. 결국 천하는 도쿠가와로 기우는데 [[가토 기요마사]] 등 히데요시의 유신들이 끝까지 히데요리를 보호하려 하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그러나 전후 처리에 있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셋쓰(摂津)[* 현재의 오사카부의 북부와 고베시 일부를 포함한 효고현 남동부], [[카와치]](河內国), [[이즈미]](和泉国)의 직할령을 제외하고 각 다이묘들과 가신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도요토미 종가의 영지인 다이코 쿠라이리치(太閤蔵入地)를 제한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요토미는 [[오사카시|오사카]] 65만 석의 다이묘로 전락한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바쿠후]]의 최고 권력자를 상징하는 [[쇼군|세이이다이쇼군]]의 지위를 획득하고 [[에도 성]] 보수에 여러 다이묘들을 동원하는 등 독자적인 정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상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천하인(天下人)의 자리에서 밀려났으나 이후에도 여전히 셋칸케(摂関家)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순조롭게 높은 관직을 부여받았으며 가신들에 대해 독자적인 관직 서임권을 행사하였고 매해 신년마다 조정의 구게(公家)들에게 거성인 오사카 성에서 참배를 받는 등 히데요시 생전과 다름없는 높은 예우를 받았다. 무가 사회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가신은 부신(陪臣)이 아닌 도쿠가와의 직통 가신과 동등하게 인정받는 등 도요토미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과 일정하게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여 일각에서는 이 시기를 두 개의 정권이 공존하는 「이중 공의 체제(二重公儀体制)」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603년 7월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이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로 부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전에 약혼했었던 센히메와 혼인하였다. 1611년 [[교토시|교토]]의 [[니조 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나는데 이 때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고 위험을 느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멸망을 결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너구리같은 성격과 본래 정권이라는 것이 이전 정권을 철저히 배제한다는 특성을 감안하면 어차피 죽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오히려 장성할 때까지 놔둔게 기적이라 봐야 할 판이다. 이 때 교토의 백성들이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열렬히 환영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막부]] 정권이 아닌 섭관 정치를 행했으며 [[일본 황실]]의 권위를 겉으로는 존중했던 인물인 것도 있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해보니 어머니 [[요도도노]]가 제대로 가르쳐서 교양과 학식을 갖추었음을 확인하고 칭찬하는 글을 남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